top of page
키리시마 에이지로, 쑥맥이어도 괜찮아!
의사
키리시마 에이지로 x 아시도 미나
"데이트!!!!"
높고 가벼운 목소리가 남성적 그 자체인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꽤 늦은 시각에다 여럿이 쓰는 건물이니, 카미나리 본인도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약 반년이 넘는 시간을 이 멍청이한테 시달려왔던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누구도 못 믿을 만할 소식이었다. 키리시마의 방 안에 제멋대로 여기저기 주저앉은 세로와 카미나리는 물론이고, 내가 염병 네 연애 소식을 대체 왜 들어줘야 하냐며 시끄럽게 따져댔던 바쿠고마저 그 소식을 듣고는 눈을 두어 번 끔뻑일 정도였다.
"카미나리, 쉿!! 나랑 아시도 같은 층인 거 알잖아... 들키면... 들키면...."
"아니... 그 거리에서 들릴 리가 없잖아... 너 혹시 바보냐?"
"...혹시 모르니까 하는 소리지..."
키리시마가 한숨을 푸우우욱 내쉬었다. 말 그대로 푸우우욱. 키리시마 에이지로. 올해로 17세. 세상에서 가장 남자답고 싶은 이. 그런 키리시마에게는... 중학교 1학년, 그니까 3년 전부터 짝사랑해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 아시도 미나였다. 밝고 명랑한 성격에 모두에게 호감형인 것은 물론이요, 키리시마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같은 중학교 동창 겸 같은 학교 같은 반의 여학생. 카미나리랑은 성격이나 관심사가 비슷해 특히 친한 편이었으나, 키리시마랑은... 글쎄, 같은 중학교 동창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독 대화 횟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런 애매하고 미묘한, 아시도와 겨우 '같은 반 친구' 사이 정도인 키리시마가 아시도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은... 오직 키리시마와 유독 친한 셋. 카미나리, 세로, 바쿠고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카미나리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키리시마 네가 아시도를 유독 띄워주는 경향이 있었긴 했는데, 어째 그 앞에서만큼은 말 한마디 못 걸고 어버버 우물거리기만 하던 게 그래서였냐며 모든 걸 깨달은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심장이 위험한 사람. 자신의... 첫사랑. 그런 상대를 무려 3년간 대화 한 번 해보지도 못한 상태로 바라보고만 있다가... 처음으로 본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으니. 쑥맥 그 자체였던 키리시마에게는 역시 조금 무리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런 일에서만큼은 눈치가 제일 빠른 카미나리가 잽싸게 알아챘던 것이었고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쩔 건데? 바로 내일이라매. 지금 당장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냐? 응?"
"시끄러!!!!!!!"
"짜증 내지 마, 바쿠고~ 너도 방금 눈 약간 땡그래졌잖아. 야, 세로. 봤냐? 봤냐? 맨날 인상 팍이던 그 브이자 눈썹이 약간 동그래지는 순간을...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 너... 그러다 또 얻어 터진다?"
카미나리가 신나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을 바쿠고가 제지했다. 세로의 능숙한 태클은 덤이었고 말이다. 아무튼, 남정네 넷이 징그럽게도 이 비좁은 방에 모여서 다같이 떠들고 있는 이유는 바로... 키리시마가 받은 데이트 신청 때문이었다. 키리시마는 데이트 같은 게 아니라며 부정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남녀 둘이 놀이공원 가는 게 어떻게 데이트가 아닐 수 있겠는가? 3년간 이어져 온 짝사랑이었다. 3년. 2년을 대화 한 번 못 해보고 지냈고, 나머지 1년도 딱히 자주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애초에 키리시마는 엄청난 쑥맥이었던데다, 지금껏 살면서 연애 한 번 못 해본 모태솔로였다. 그런데 갑자기... 갑자기. 3년간 바라보기만 했던 그 여자아이가. 문득 찾아와서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맑은 얼굴로 방긋이 웃으면서... 내일 같이 놀이공원이나 안 갈래? 라고 했단 말이다.
"... 다시 생각해도 위험하다니까 그거..."
"니 심장이?"
"... 어떻게 알았냐?!?!?!"
키리시마가 세로의 한 마디에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카미나리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맞았다. 아니, 정확했다. 키리시마는 아시도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기뻐서 죽을 뻔했는데,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는 얘기를... 들어 버렸다. 들었다. 아니, 들은 게 아니었다. 가자는 부탁을 받았다. 말 도 안 돼. 물론 키리시마도 종종 그런 상상을 하고는 했다. 아시도와 손을 잡고 걷는다거나, 사진이라도 찍는다거나, 스킨쉽을 한다거나 한... 평범한 짝사랑 중인 고1 남자애 같은 상상을 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그건 항상... 상상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니까 현실일 수가 없는 일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날... 기회가 생겼다. 으아아!! 그런 생각만 하면 키리시마는 심장이 과하게 뛰어버리고는 했다. 얼굴이 씨벌개져서는 숨을 미친 듯이 몰아쉬는 꼴은... 그 친구들에게는 제법 흔한 일이었다.
"... 근데 왜 불렀냐? 겨우 이딴 얘기 하려고? 간다 그럼?"
"아아, 바쿠고... 잠깐만!! 그게 아니란 말이야."
"그럼 뭔데, 이 등신 머리야... 졸리다고."
"... 적어도 너희가 나보다는 연애 경험이 많을 거 아냐."
"... 그래서?"
"헤엘프."
"씨발..."
바쿠고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고, 키리시마가 머쓱하게 제 상어이빨을 드러내며 하하 웃었다. 몇 번이고 말했던 사실이지만, 키리시마의 첫사랑은 아시도였다. 물론 지금 짝사랑 중인 상대도? 아시도다. 3년간 식지 않고 좋아해 온 사람도? 물론 아시도다. 키리시마는... 단 한 번도 아시도 이외의 사람을 이성으로 바라본 적 없었다. 그러니까, 데이트할 때 분위기 잡는 방법이라거나, 입고 가야 할 옷이라거나, 어떻게 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그에 반해... 키리시마에게는 깃털보다 더 가벼울 것만 같은 카미나리라던가, 현재 연애 중(무려 우라라카와!)인 바쿠고라던가와 같은... 적어도 본인보다는 나을 법한 소중한 친구들이 주르륵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애초에 본인이 아시도를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이 셋뿐이기도 했고 말이다!
"애초에 연애를 안 해본 게 이상한 거 아냐? 너 고등학교 1학년 맞냐?"
"원래 남자의 인생에 여자란 한 명뿐이다!!!!!"
"나는 쟤가 등신이다에 삼백 엔 건다."
"난 사백!"
"... 아니...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야...?"
키리시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급했다. 바로 내일이... 내일이 데이트, 아니 데이트가 아니라!! 놀러 가는 날이었다. 내일이 오기까지 다섯 시간도 채 안 남은 상태였다. 그니까, 정말로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키리시마는 연애 관련해서는 뭐든 미숙했고 요령도 방법도 모르는 것들만 잔뜩이었다. 도움이 아니더라도 조언은 꼭 필요했다. 원래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지만... 그런 건 숨기고 싶었다. 아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에 연인이 있었을 터이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예쁘고 밝은 여자애가 연인이 없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처음인 건 본인 뿐이라는 것이다. 미숙한 티를 내기 싫다는... 얄랑한 자존심. 키리시마는 주먹을 꽉 쥐고 다짐했다. 꼭... 꼭! 내일은... 꼭! 아시도와 반 친구 그 이상의 사이가 되겠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어가겠다고!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비장한 얼굴로 다짐에 다짐을 가하는 키리시마였다...
"쨋든!! 여자 꼬시는 거 하나는 내가 또 전문이잖냐. 응? 성공률 100퍼센트의 카미나리 the 연애 선생 아냐."
"그래, 그래!! 뭐가 됐던 다 믿고 따를 테니까...!!"
"... 쟤네 저렇게 둬도 되는... 되는 건가..."
"... 내 알 바냐?"
남자 넷의 징글징글한 밤이 그렇게 져 가고 있었다. 웃음소리와 욕설과 비명이 뒤섞인 밤이...
햇살, 새소리. 다음 날. 키리시마는 어색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 데이트... 가 아니라! 같이 놀러 가는 날이었다. 한두 시간 뒤면 아시도를 볼 테고. 그럼... 그럼... 으아악! 키리시마의 머릿속에서 또 한 번 전쟁이 일어났다. 머리색과 똑같을 정도로 빨개진 얼굴은... 솔직히, 카미나리 같은 애들이 봤다면 분명 비웃음 당했을 표정이었다. 어젯밤, 정말 별에 별 사투를 다 했다. 무려 새벽 세 시에야 전부 끝내고 잠들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니, 친구 옷 골라주는 데 쌈박질까지 할 건 또 뭐람... 쨋든, 거울에 비친 키리시마의 모습은 거의 완벽했다. 빳빳하게 왁스 칠한 머리(물론 스타일을 결정하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리긴 했다), 요새 유행이라며 카미나리가 본인 방에서 꺼내온 옷을 멋대로 입히려는 걸 제지하고 어떻게든 챙겨 입은... 남친룩. 메이드 바이 세로, 바쿠고의 손길도 아주 조금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옛날에 아시도와 맞췄던 팔찌!
이거 없으면 안 되지... 키리시마가 다시 거울 건너의 자신을 바라봤다. 올린 앞머리에, 뿔처럼 세운 두 뭉치의 머리칼들. 막연히 아시도를 닮고 싶다는 마음에 만들었던 헤어스타일. 지금은 바쿠고가 키리시마를 등신 머리라고 부를 만큼이나 자신의 상징이 되었지만... 사실 옛날에는 저 스타일이 아니었다. 유에이에 진학하면서 스타일을 바꾼 것... 이었고, 원래는 검고 내린 머리. 키리시마는 제 옆머리를 매만졌다. 닮고 싶다는 마음. 동경심. 처음에는 그 정도였는데. 어느새 연심으로 발전했고 어느새 짝사랑이 되었다. 아주 오래된 얘기. 그렇지만 그 마음 중 하나도 식은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과하게 커졌다고 해야 할까... 키리시마가 옛날 생각에 젖어있을 동안, 키리시마의 방 벨 소리가 울렸다. 지금 시각은 열 시 반. 만나기로 한 건... 역 앞에서 열두 시. 어라? 올 사람이 있나? 키리시마가 방 문을 조심히 열... 려던 순간, 쾅! 하고 문이 열어제껴졌다. 키리시마가 당황할 새도 없이...
"키리시마~~!!"
아시도가 팔짝거리며 뛰어들어왔다. 아시도는 키리시마에게 분홍빛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서 노란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키리시마를 몇 번 관찰하다가, 또 순식간에 멀어져서는 키리시마의 방을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비록 방왕 정하기 대회에서는 남친감으로는 완전 꽝이라는(그날 밤에 키리시마는 혼자 울었다) 혹평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관심은 꽤 있는 건지... 아시도는 키리시마의 방을 조목조목 뜯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키리시마는... 구석에서 본인의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시도에게는 아니었겠지만 키리시마에게 방금 상황은 분명 꽤 위험했다. 카미나리가 티 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지만 이건, 솔직히 전적으로 아시도의 잘못이었다. 아시도 탓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건... 제발 본인이 여자애라는 걸 조금은 생각해주면 안 되는 걸까...? 키리시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통수를 몇 번 긁적거리다 물었다.
"그래서... 왜 벌써 온 건데?"
"응? 아니~ 어차피 같은 건물에서 같은 곳으로 가는 건데 먼저 만나서 같이 가면 좋지 않나 하고!"
"... 어? 그럴 거면 왜 역에서 만나자고 한 건데...?"
"... 그렇네~~?!!"
아시도가 놀란 듯이 말했고, 키리시마가 허탈하게 웃었다. 사실 둘이 같은 건물에 산다는 사실은... 둘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같은 데에서 같은 곳으로 이동하는 길은... 당연하게도 같다. 그러니까 시간대가 엇갈리지 않는다면 둘은 중간에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진짜로 엄청난 멍청이가 아니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때의 키리시마는... 음, 진짜로 엄청난 멍청이 상태였다. 왜냐면, 짝녀한테 데이트 신청을 받은 순간이었으니까! 그 때, 맑게 웃으며 같이 가지 않을래? 라고 묻는 아시도에게 키리시마는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가을이었고 벚꽃 대신 낙엽이 휘날리는 날씨였지만... 키리시마의 머릿속은 첫사랑을 깨닫던 그 순간에 갇혀 있었다. 아시도가 역에서 만나자~ 라고 말하고 후다닥 달려 나가 버리는 것을 대답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던 키리시마에게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몇 시에 만나기로 했던 건지 기억할 여유는 없었다. 그 탓에 카미나리의 도움을 받아 약속 장소와 시간을 다시 알아내기까지 했지만... 당일까지 너무 긴장해 있느라 뭐가 문제였는지 알 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왜~ 키리시마는 나랑 같이 가는 거 싫어? 싫으면 나 그냥 방에 갈까? 이따 다시 보고? 그럴까?"
"어? 어... 아니?!?!"
"헤헤, 그렇지? 나도 키리시마랑 같이 가는 게 엄청 좋으니까~!! 놀이공원, 얼마나 가고 싶었는데!"
엄청 좋다, 엄청 좋다라... 키리시마가 멍하니 아시도가 배시시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위험해. 위험하다고...!! 엄청 좋다는 말도 분명히 놀이공원 가는 게 좋다는 뜻인데! 자꾸...! 키리시마는 솔직히 말하면 울 것 같았다. 지금은 친구다. 친구. 아시도에게 나는... 이성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두근거리는 일 따위 떠올릴 수도 없다. 중학교 동창일 뿐이고, 그냥... 티켓이 남아돌아서,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함께하는 것뿐이다. 짝사랑은 말 그대로 짝사랑이다. 나 혼자 하는 사랑이다. 혼자만의... 혼자만의 감정. 그렇게 생각하니 또 어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3년간 오래되어 쌓인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면, 그리고 그걸 뱉어버리면. 그럼 지금처럼 '친구' 사이도 포기해야 한다. 3년. 소중히 간직했고 꾸욱 눌러왔다. 그러니까, 더욱.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은... 글쎄다, 키리시마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심장이 제멋대로 움직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시도가 웃는 모습에, 그때처럼, 다시 한번.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있잖아 키리시마, 나 오늘 놀러 가는 거 엄청 기대했다~? 봐, 분장도 엄청 열심히 했고! 키리시마는... 분장, 안 했어?"
"분장? ...굳이...? 할 필요 있는 거야, 그거...?"
"... 역시 남자애들의 사고 회로는 좀 다른 건가?! 오늘 할로윈이잖아, 나는 네가 분명히 분장 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 어?!"
키리시마의 붉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달력... 달력이... 빨간 글자로 놀이공원!! 이라 써 두고, 특히 튀게 동그라미도 팍팍 쳐 둔 그 날짜는... 10월 31일. 즉, 할로윈! 일본에서는 웬만하면 안 챙기는 명절에다가, 데이... 트가 아니라 놀이공원에 가기로 한 것 때문에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할로윈. 하긴, 아시도 같은 애들은 잘 챙기려나... 작년에는 입시 때문에 고생하느라 전혀 챙기질 못 했으니... 분장하는 거 되게 재밌어 보였는데. 그제야 키리시마의 눈길이 아시도의 옷 쪽으로 향했다. 할리퀸... 인가? 얼굴 쪽 분장은 전혀 안 한 것 같았지만, 옷은 꽤 열심히 차려입은 듯이 보였다. 반바지, 배꼽티. 운동화랑 망사 스타킹에 매직으로 그린 것 같은 문신... 노, 노출도가... 꽤 높지 않나?! 머릿속에 번뜩 지나간 생각에 키리시마가 훅 하고 고개를 올렸을 때는... 씨익, 하고 누구보다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시도가 있었다. 앗. 아. 그... 아...!!
"왜, 키리시마~? 내 옷이 그렇게 예뻐? 그렇게 얼굴까지 빨개져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싶을 정도로? 근데 너무 오래 쳐다보면 좀 부끄러운데!"
"아... 그... 미안해. 분장이 멋져서...!! 나... 는 준비 못 했는데..."
"아, 상관없어! 봐, 나도 페이스는 하나도 안 했잖아. 가서 할 거니까! 키리시마는 얼굴만 해도 괜찮을 걸. 이빨이 받쳐주니까~ 같이 하자. 응?"
아시도가 키득였다. 분장, 이라... 재미는 있겠네... 키리시마는 조용히 뒷목을 긁적였다. 역시 정말로, 데이트는 아니었던 거구나... 할로윈이라서... 하긴. 아시도가 나랑 데이트를 왜 가겠어. 아시도는 남자애들이랑도 친하게 지내니까... 그냥 친구랑 놀러 가는 느낌이었겠지. 남자인 친구랑. 갈 친구가 없어서... 키리시마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설레발이었구나. 그랬구나. 가끔 키리시마는 아시도에게서 조금의 벽을 느끼고는 했다. 키리시마는 아시도를 3년간 봐 왔지만, 아시도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키리시마는 종종 잊어버리고는 해서. 키리시마가 아시도를 동경해오는 동안 아시도는 제 자리에서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모습이 좋아서 동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그건 오직 자신의 시야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시도는 제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키리시마는 종종 잊어버리고는 했다. 괜히 씁쓸해진 마음에 키리시마가 입술을 살며시 꾹 깨물었다. 본인 이빨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잠깐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입술에서 피가 주룩 흘렀다는 건 눈치 못 채고 말이다.
"키~ 리~ 시~ 마~!!"
"어? 왜, 왜? 이제 갈... 까?"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입술에서 피 주룩 난 거 알아? 분장을 벌써부터 할 생각이야~?"
"어?! 진짜?! 잠, 잠시만... 금방 닦을게!!"
"아냐, 잠시만 이리 와 봐! 해주고 싶은 게 있거든~!"
"해, 해주고 싶은 거...? 뭔... 데? "
키리시마가 멍하니 아시도 근처에 섰다. 별 건 아니고~ 눈 좀 감아봐! 라며 아시도가 키리시마에게 가까이 가 섰다. 뭐. 뭔데...? 불안한 마음은 뒤로하고 키리시마가 눈을 꼭 감았고...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키리시마의 입가에 뭔가 닿았다. 부드러운 느낌, 매끄러운 감촉... 이, 이거... 살인가? 피부? 누구의? ...당연히 아시도겠구나. 잠깐. 뭐?! 아, 아시도... 가? 왜? 두근. 두근. 두근... 생각이 한 발짝 진행될 때마다 심장 소리도 한 발짝씩 빨라져만 갔다. 그새 키리시마의 입가에 닿았던 그것은, 아래쪽으로 한번 입가를 쓸고, 떨어져 나갔다. 두근. 두근. 두근. 진정은 커녕이고 배로 빨라진 키리시마의 심장 소리를 배경음 삼아서... 아시도의 엷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뭐가 닿았는데? 키리시마가 살며시 눈을 뜨자...
"쨘~!!"
그 눈앞에는 본인의 얼굴이, 아니... 확실히 말하면 거울이 있었다. 입가에 피가 번진... 아? 번졌다고? 왜? 키리시마가 상황은 커녕이고 지금 제 눈 앞에 뭐가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던 가운데... 아시도가 다시 한번 꺄르르 웃었다.
"아니~ 딱! 하고 생각났거든. 할로윈에 놀이공원을 가는데 정말로 분장 하나 없이 가는 건...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즉석에서 한번 해 봤어~!"
"아, 그랬구나...!! 갑자기 뭐가 닿아서 놀랐잖아... 하긴 할로윈인데 너무 밋밋하게 가는 것도 좀 그렇나..."
"그지, 그지~!! 나도 봐, 이렇게 열심히 분장했는데! 키리시마만 평소 같으면 서운하잖아~?"
아시도가 방긋이 웃어 보였다. 그, 그렇네... 키리시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같이 웃었다. 뭔가 했네, 난 또! 남자답게 넘기자! ...로 넘어갈 것 같냐?!?!?! 비상, 비상이었다. 말 그대로 비상!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얼굴이 화끈해져 왔다. 아시도는... 본인이 남자애 방에, 남자애랑 단 둘이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건가? 아니면 그 정도로... 내가 남자로 안 보이나?! 둘 다 설득력 있는 소리였다. 남자로 안 보이는 편은 최악이고, 단 둘이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건... 그 편이 그나마 나았다. 둘 모두 키리시마의 연애전선에 좋은 현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시도는 가끔 이렇게 키리시마를, 그리고 그 주위 친구들을 놀려먹으려고 굴 때가 있었다. 자유분방한 여자아이. 그것이 사람들이 아시도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건 키리시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점마저도, 키리시마는. 너무나도 좋아해서! 그 예측 불가한 행동마저도, 너무나도 좋아해서! 가끔 이렇게 얼굴에 붉은빛 비상등이 떠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갈 때 된 거 아냐, 아시도...? 나도 분장... (이걸 분장이라고 할 수 있나? 잠깐 고민에 빠진 키리시마였다.) 했으니까."
"헛, 그러게! 열두 시에 보기로 했는데 벌써 열한 시 반이잖아!! 늦, 늦은 거 아냐...?!"
"... 누구랑 보기로 했는데?"
"키리시마."
"지금 네 눈앞에 있는?"
"... 그렇네?! 그럼 좀 여유 부려도 되나?"
"... 아니, 그건 안 될걸... 기차 시간이 있잖아."
"그렇네...!!!"
키리시마와 아시도가 묘한 만담을 주고받는 동안, 키리시마의 휴대폰이 울렸다. 열한 시 반 알람. 하긴, 기숙사에서 역으로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뛰어야 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키리시마와 아시도의 눈이 교차했고... 동시에 퍼뜩. 아시도는 키리시마의 방구석에 제멋대로 던져둔 본인의 가방을 잡아챘다. 한편 키리시마는... 아시도가 올 줄 모르고 벗어두었던 자켓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다시 키리시마와 아시도의 눈이 마주쳤고... 아시도가 방긋이 웃었다. 아시도가 키리시마의 손을 잡아채서, 꽉 잡고는, 여전히 해맑게 웃은 채...
"뛰어!!!!"
"응!!!!!!!"
와다다, 아니... 우다다? 히어로가 되기 위해 단련해온 시간들을 모두 쏟아붓듯이 손을 꽉 잡고.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쌩~ 하니 친구들이 있는 거실을 지나쳐서는, 문을 확 열고는 또 뛰었다. 줄줄이 지어져 있는 기숙사 부지들을 따라... 모든 걸 바치는 것처럼... 겨우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데이트에 늦지 않기 위해. 놀이공원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참고로 티켓은 당일 한 시까지가 유효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뛰었다. 사실 이건 키리시마는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손을 꽈악 맞잡고서 말이다. 두근두근 시추에이션일 수도 있었지만... 키리시마의 머릿속에는 아시도가 기껏 놀이공원에 가자고 해 줬는데... 정도의 생각이 고작이었다. 그러니까, 둘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둘 중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시도도 당연히 열심히 구한 티켓을 날려 보내는 슬픈 일은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정신없이 뛰고 있었으니까!
"... 쟤네 뭐냐?"
"알 바야?"
거실에 널브러져 휴대폰이나 만지고 있던 카미나리와 세로가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휭 하고 뛰쳐나간 정문을 멍하니 쳐다봤다. 진짜 뭐야 쟤네...? 짝사랑이라매...??
달리고, 또 달리고... 저 건너에 역이 보일 때쯤, 눈앞에 횡단보도가 둘을 가로막을 때 즈음에 둘은 멈춰 섰다. 거친 숨을 몇 번 내쉬다가 문득 눈을 마주치고, 아시도가 깔깔 웃었다. 키리시마도 멋쩍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뛸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 10분을 전력으로 질주. 지금 시각은 열한 시 사십 분이었다. 이십 분 뒤에 열두 시 기차를 타면 열두 시 반쯤 도착할 것이고, 그럼 온라인으로 받은 티켓을 보여주고, 놀이공원에 입장해서. 실컷 논다. 그러니까 한 시간 뒤에 키리시마는... 정말로 아시도와의 데이트를 시작할 것이다. 아니, 데이트가 아니지만! 데이트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조금 심장이 뛰는 건...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함께 있는 남고생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진짜로, 어쩌면... 두근거리는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나한테만 말고, 너한테도! 키리시마는 그런, 별 거 아닌 의지를 단단히 다졌다. 어제 저녁부터 우당탕 준비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회상하면서... 고생했던 모든 순간들을 회상하면서 말이다.
"있잖아, 키리시마~ 열두 시 기차인데. 시간 좀 남거든. 뭐라도 할래? 뭐라도 먹을까?"
"점심... 먹었어?"
"응!"
"... 나도 먹었는데."
긴장해서 점심을 좀 일찍 먹긴 했다. 아홉 시... 쯤에 먹었나. ...이건 아침인가?! 아니, 사실 그렇다고 지금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지만... 아... 신호등 엄청 안 바뀌네. 키리시마가 건너의 역을 생각 없이 바라봤다. 침묵. 잔잔한 공기가 흘렀고... 키리시마도, 아시도도. 한참을 뛰었고 꽤 지쳐있었다. 열리지 않는 횡단보도 건너를 조용히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는 재미있었다. 아니, 아시도랑 같이 있어서 즐거운 건가? 그런 건가? 키리시마가 횡단보도에서 눈을 떼고 살며시 아시도 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분홍색 피부, 노란 눈동자. 검은자위에 노란 뿔. 분홍빛의 복슬하고 짧은 단발과... 항상 방긋이 미소 짓고 있는 입. 아시도 미나. 그것이 키리시마가 줄곧 봐오던 여학생의 모습이었다. 예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키리시마의 눈동자는 아시도에게서 빠져나가질 못했다. 중학교 때는 학교의 아이돌 취급을 받던 애였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금도. 반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생기를 담당하는 사람. 그런 아시도와 단 둘이서 데이, 아니 놀이공원이라니... 혹시 꿈... 인가? 어? 그런가? 그럼...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헤헤. 조금은 판타지적이고 붕 뜬 생각을 하던 키리시마의 손을 아시도가 콱하고 잡아챘다.
"뭐 해~?"
"어... 어?!"
"횡단보도 열렸잖아~ 가자!"
"어, 아... 응...!!"
딴생각하던 거. 걸렸나... 아시도가 키리시마의 손을 잡아채고는 맑게 웃으며 뛰어나갔다. 아시도에게 붙잡혀 버린 키리시마도 키 차이 탓에 조금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시도의 손을 꼭 맞잡고는 아시도를 따라 걸었다. 티, 티 많이 났나...? 화났으면 어쩌지...? 키리시마가 횡단보도를 따라 걷다가 역 앞에 도착했을 때쯤, 다시 아시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딴생각... 하면 안 될 건 없지만. 역시 실례였으려나. 그런가... 미안하다고 해야 하려나? 애매했다. 뭐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 애매한 관계. 애매하기 짝이 없는... 간격. 괜히 시무룩해졌다. 손에 힘이 빠져버렸다. 연인도 아니고 데이트도 아니다. 붕 뜬 감정을 가라앉힐 필요성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내려앉을 필요는 없었는데.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새 삐죽 내밀어버린 입술이 티가 났는지, 먼저 가고 있던 아시도가 키리시마를 향해 빙글 돌았다. 뺨에 공기를 가득 넣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키~ 리~ 시~ 마~!"
"어? 아, 아시도... 왜...?"
"방금도 딴생각했지! 나랑 둘이서 놀러 가고 있잖아. 자꾸 그러면 나 삐진다? 혼자 간다?"
"뭐?! 아니. 그, 그건..."
"싫~지~? 그러니까 잘해, 키리시마! 또 이러면 나 진짜로 갈 거야. 멋대로 손도 놓고 말야!"
"어? 손...?"
손?!?! 키리시마가 그제야 황급히 지금껏 손에 쥐고 있던 것의 감각을 회상했다. 손을 잡았... 아니, 잡혔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건지 키리시마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갈 때, 아시도가 푸흡 웃어버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쑥맥은 쑥맥이구나... 손 잡은 것도 모를 줄이야! 키리시마가 어버버 하며 뒤늦게 당황하는 모습이 아시도에게는 너무 재미있어서... 아시도는 가끔 짓궂게 장난쳐버리고 말 때가 있었다. 아시도의 장난 탓에 키리시마의 머릿속은 한창 전쟁 중이었지만 말이다. 손을 잡았다. 그것도 꽤 꽉. 근데 내가 놓쳐버렸다. 아!!! 키리시마는 내적 비명(솔직히 외적으로도 조금 티가 나긴 했다) 을 지르고 있었다. 생각 없이 손을 맞잡았다는 사실이야 키리시마에게는 오히려 이득이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다 놓쳐버린 건... 절대 이득이 아니었다. 아니, 최악이었다!! 데이트 중에 손을 놓는 남자라니. 남자다움을 논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최악이야!! 키리시마의 머릿속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던 가운데, 문득 키리시마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손을 잡았다는 건. 그것도 아시도가 '먼저' 내 손을 잡았다는 건...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 가능성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런 건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원래의 다섯 배로 붕 뜬 느낌이었다. 우라라카가 몰래 자신에게 개성을 발동시켰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오늘의 목표, 달성...!! 이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조금 빈약한 출발이었다만... 뭐 어때. 시작이 반 아니겠는가! 키리시마는 그런 느낌으로 씩씩하게 미소 지었다. 옆의 아시도도 방긋이 웃어 보였고 말이다!
그 뒤는, 어, 솔직히... 별 일이 있지는 않았다. 키리시마와 아시도는 기차표를 끊었고, 역에서 조금 돌아다니다가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올라탔다. 타서는... 음, 타서도 별 일이 있지는 않았다. 키리시마는 어제저녁 모였던 인원들에게 손 잡았다고 보고나 했고, 아시도는... 키리시마가 과연 본인에게 언제 고백할 것인지에 대해 여자아이들과 라인으로 토론했다. 그러니까 기차 내에서는 둘 다 휴대폰이나 보고 있었다. 아직 놀이공원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기를 쏙 빼 두었으니, 쉴 시간이 필요했던 건 당연했다. 게다가 도착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으니까. 삼십 분이면 도착하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위치의 놀이공원. 마침 할로윈 이벤트도 하고 있다고 했다. 둘 모두 가슴속에 두근거림을 품고 있었다. 물론 그 종류는 좀 달랐지만 말이다!
"도착~!"
아시도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삼십 분은... 키리시마에게는 좀 부족했다. 아시도에게는 아니었지만, 키리시마에게는... 엄청난 일들이 족족 있었으니까! 기차가 멈추고서도 휴대폰을 붙잡고 있던 키리시마는 아시도가 도착이라 외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시작이니까! 이제서야, 진짜로 데이트 시작이니까!
키리시마의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말 그대로 휘리릭~ 하고. 한시가 되기 직전쯤 기차에서 내린 둘은, 또 한 번 놀이공원의 표를 끊기 위해 전력 질주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추어 아시도가 휴대폰에 저장해둔 표를 직원에게 내밀었고, 둘의 손목에는 종이 끈 팔찌가 채워졌다. 환상의 나라... 제법 거대한 놀이공원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할로윈 분위기를 내려 노력한 것인지 온갖 곳에 거미줄과 호박이 꽂혀 있었고, 으스스한 배경음도 흐르고 있었다. 물론 해는 쨍쨍했다.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아시도는 마음에 든다는 듯 팔짝팔짝 뛰어다니다가, 키리시마의 손을 잡아채고는 저어 쪽을 가리켰다. 분장을 받아야 한다며, 자신이 멋대로 한 분장은 마음에 안 들지 않냐며 건너에 분장해주는 곳이 있단 말과 함께 밝게 웃어 보였다. 역시 위험한 웃음이라니까... 같은 감상을 남기며 키리시마는 아시도를 따라 걸었다. 딱히 뛸 것까진 없다며 들뜬 아시도에게 조금 진정하라는 말도 덧붙였고 말이다. (솔직히 키리시마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전문적인 분장...이라고 하기엔 그냥 물감 바른 정도 아닌가? 키리시마가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눈가의 흉터를 연장해서 꿰맨 자국을 그려 넣었고... 입가의 피는 그대로 유지했다. 이유는... 딱히 설명이 필요할까? 흘끗 본 아시도의 분장은... 완벽한 할리퀸이 완성된 참이었다. 할로윈인 걸 까먹다니, 나도 진짜 바보인가... 분장이라도 해 왔으면 더 좋았을텐데. 거울 앞에서 본인의 얼굴에 그려진 분장을 몇 번 쳐다보던 키리시마는 문득 그런 생각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시도도 어이없었겠지. 하긴... 10월 31일에 놀이공원. 누가 봐도 할로윈 때문인데... 날짜감각도 점점 없어져가는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키리시마는 문득 곁에 아시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자... 아, 저쪽인가. 아시도가 어트랙션 존 근처에서 팔을 휘휘 휘두르고 있었다. 후다닥 달려간 키리시마는 딴 생각 하지 말라고 했지! 라는, 아시도의 가벼운 잔소리에 식은땀을 약간 흘리면서 아시도의 손을 잡았다. ...손 잡는 거 정도는 괜찮겠지? 이미 잡았... 으니까? 그렇겠지? 그런 생각으로 키리시마는 아시도 쪽을 바라봤다. 아시도는... 입술을 잠깐 꾹 깨물더니, 키리시마의 손을 조금 세게 맞잡았다. 아프잖아...! 삐졌나...? 역시 먼저 손 잡는 게 아니었나...? 키리시마가 슬쩍 눈치보듯 눈동자를 굴렸다.
"가자, 키리시마~!!"
아시도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 뭐야... 괜찮은...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애의 마음을 맞추는 건 역시 키리시마에게는 아직 무리였다. 본인의 남자다움! 을 매번 부각하는 키리시마에게는.
키리시마와 아시도는 정말로 해가 질 때까지 실컷 놀았다. 아시도가 우기는 바람에 둘은 머리띠도 맞춰 썼고, 어트랙션 존에서 있는 놀이기구란 놀이기구는 다 타... 려고 노력했다(질보다는 양이라고, 줄이 너무 긴 건 그냥 스킵했다). 거기다 비명도 엄청나게 질렀다. 목이 다 아플 정도였다! 아무리 유에이 학생이어도... 물리적 공포는 가끔 정돈 버거울 수 있다. 애초에 히어로가 될 수 있는 자격에 어트랙션 잘 타기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프로 히어로여도 놀이기구 못 타는 사람은 못 탈 것이다. 음, 당연하지! 무튼, 둘은 정말 온갖 걸 다 즐겼다. 탈 게 없어서 아동용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잠깐 진지하게 고민해봤을 정도였다. 물론 그냥 다른 구간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넘기기로 했지만 말이다! 저녁까지 해치웠고, 즐길 건 다 즐겼다. 이제... 남은 건 퍼레이드와 할로윈 이벤트 정도였다. 유에이 규정 상 해 지기 전에는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는데, 도착할 시간까지 생각하면... 곧 가봐야 했다. 키리시마가 아시도의 눈치를 슬쩍 봤다. 엄청 기대하고 있는 것 같던데... 이벤트들은 시작할 낌새조차 안 보였다.
그 때, 9시에 할로윈 이벤트를 시작한다는 공지가 울려퍼졌다. 9시면... 완전 불가능이었다. 그때까지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 시각은 일곱 시가 조금 넘어 있었고, 통금 시간을 맞추려면 여덟시에는 돌아가야 했다. 그러니까... 할로윈이라던가 퍼레이드라던가를 즐기는 것은 완전 불가능이었다. 아슬아슬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불가능. 손가락으로 시간을 계산해보던 아시도는 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계속 유지해오고 있던 미소를 놓쳐버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아시도는 무려 3주 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할로윈 이벤트를 위해서였다. 작년에는 입시 탓에 할로윈은 커녕이고 놀이공원에 갈 시간조차도 없었고, 올해야 드디어 여유가 나 아이자와 선생님께 외출 허가서까지 받아가면서 할로윈 이벤트를 잔뜩 즐기겠다는 포부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주 전에 티켓을 얻었고 갈 사람까지 얻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런다고?! 아시도에게는... 너무한 일이었다. 아이자와 선생님은 분명 5분만 늦어도 페널티를 주시겠지. 그게... 합리적이니까...!!
"...기숙사로... 돌아가야겠지, 아시도?"
"응, 그렇지..."
아시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퍼레이드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직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 좋았는데... 아시도가 속상한 감정을 꾸욱 참고 있을 때, 키리시마는 완전히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그야 그랬다. 애 표정이 갑자기 시무룩해졌으니까! 애초에 키리시마는 오늘이 할로윈인 것도 잊고 있었고, 할로윈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키리시마에게 이벤트를 못 즐기게 된 건, 그냥 아주 조금 아쉬운 일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아시도에게 이벤트를 못 즐기게 된 건... 정말... 최악에 가까웠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햇는데. 아시도가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아쉬웠다. 물론 무슨 환상이던 끝날 때가 있고, 꿈도 언젠간 닫혀버리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눈 앞에서 날라가 버리는 건! 싫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속상해. 아시도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봤다. 이런 건 정말로, 아무래도 싫단 말이야...
"그으, 아시도...?"
"아, 응...!! 가야지. 통금 맞추려면..."
"아아니, 그게 아니라... 그... 많이 속상해?"
"...응."
아시도가 대답했다. 그렇구나. 키리시마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간격. 한번 더. 미묘한 간격. 멀어져가는... 키리시마가 아시도 쪽으로 눈을 옮겼다.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괜찮아? 아니... 전혀 안 괜찮잖아. 키리시마가 머뭇거리고 있는 새에, 아시도가 키리시마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제 가야겠다. 그지... 그런 한 마디를 남기면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런 건 아시도한테 안 어울리는데. 그런 생각으로 아시도를 물끄러미 보던 키리시마도 그냥. 응. 그만 가자. 그렇게 대답해버렸다. 조금 더 있다가 가도 괜찮았지만... 아시도의 표정이 나빴다. 이런 기분으로 계속 있는 건, 둘 모두에게 안 좋았다. 키리시마는 아시도가 웃는 모습이 좋았으니까. 시무룩해져 있는 건 싫으니까... 키리시마도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상황이 나빴다. 여러모로, 나빴다.
둘은 조용히 놀이공원을 빠져나갔다. 느릿하게, 조용히. 조금 걸었고 그대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그때까지 둘은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나누지 못했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괜히 투정부린 것 같아서. 복합적으로 뒤섞인 감정이 잔잔히 흐르던 공기는 조금은 숨 막혔다. 경계, 거리. 선. 멀어지는 감각. 그럴 때마다 키리시마는 종종, 중학교 때와 달라진 거 하나 없다는 생각까지도 들고는 했다. 용기를 내고 싶었다. 용기를 내야 했다. 그때의 내가 아니니까. 성장했으니까! 키리시마가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 기차는 어느새 역에 도착해 있었다.
"저기, 키리시마~"
"응?!?!?!"
"어? 아니... 내릴 때 되서."
"아, 그렇네..."
그리고 또 정적. 어색한 침묵. 불편하다. 잠깐의 대화 뒤에 학교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던 둘은 처음의 두근거림조차도 가라앉은 채 마냥 걷고만 있었다. 싫다... 키리시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타이밍을 못 찾겠어. 그렇게 하염없이 걷던 와중, 저 건너에... 유에이 부지가 보였다. 창문이 가득한 파란 건물. 곧 도착이었다. 그럼, 그럼... 아시도는 금방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릴 테고. 그럼, 데이트는 완전히 망쳐 버린 꼴이 되고 만다. 그건, 정말로... 그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다시 오기도 힘든 기회인데...!!
"그, 아시도!!"
"응?"
"저... 하, 할로윈. 못 즐겼더라도..!!"
"...응?"
"다음에 또 오자. 다음에 또 오면... 그때는, 그때는... 꼭. 어떻게든. 같이 이벤트 즐기면 되니까! 그땐 내가 꼭 분장도 해 올게!!"
...나 방금 뭐랬냐?!?! 키리시마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확실히, 뜬금없었다. 조용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크게 소리쳐 버렸다! 키리시마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아... 망했다. 망했다!! 키리시마는 그 자리에서 그냥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렇게나 말해버렸다. 무슨 말을 할 지라도 정해둘걸. 그러기라도 할 걸...!!
"풉."
아시도의 웃음이 슬쩍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하하, 키리시마~!!"
"으, 응...?"
"나 속상해 보여서 말해준 거지?"
"...응."
"너무 그럴 거 없어~! 난 괜찮았는데~ 재밌게 놀았잖아. 그럼 된 거지!"
"...그런가..."
키리시마가 뒷목을 긁적였다. 그런 거 치고는 많이 시무룩해 보이던데, 아시도... 흘끔, 하고 쳐다본 아시도의 표정은. 적어도 조용히 걷고 있을 때보단 좋아 보였다. 내가... 조금은 도움이 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약간은 기분이 좋아졌다. 적어도 아시도의 표정이 이전처럼 시무룩해 보이진 않았으니까. 키리시마한텐 그걸로 된 것이었다. 그냥, 그걸로 된 것이었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그래, 그냥 그걸로 된 거겠지. 뭐. 키리시마는 슬쩍 미소지었다. 아시도도 방긋이 미소지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를 걸었다. 오는 길에, 아시도는 오늘 너~ 무 재밌었다며. 온갖 이야기를 다 했다. 자기한테 머리띠가 엄청 잘 어울렸다는 얘기, 네가 안 보고 있을 때 사진을 찍었는데 몰랐냐는 얘기라던가. 정말 온갖 이야기를 다 해줬다. 키리시마가 뜬금없이 다음에 또 오면 될 거란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치만 이게 아시도니까. 키리시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시도의 이야기에 맞장구쳐줬다.
나란히 걷던 둘의 시야에 익숙한 건물 하나가 걸렸다. A반 기숙사 건물. 이제 진짜 다 왔구나... 그런 생각으로 키리시마는 아시도 쪽을 바라봤다. 최고는 아니었다. 손 잡는 것밖에 못 했고 아직 아시도의 마음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후반엔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아 버리기까지 했다. 그치만, 그치만... 적어도 최악도 아니었다는 데에, 키리시마는 만족하기로 했다. 여자애랑 놀러가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아마 잘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 걸 카미나리나 세로가 안다면... 분명 비웃으려나. 뭐, 상관없었다. 지금 내 옆엔 아시도가 있는데!
"저기, 키리시마~"
"응?"
"오늘 엄청 재미있었어~!"
아시도가 화알짝, 밝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 잘 한 거겠지... 키리시마가 그런 생각으로 아시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시도는 또 한번 소리내어 웃었다. 아직도, 키리시마는. 아시도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었다. 방금도 심장이 무너질 듯이 뛰어버리고 말았으니까!
"나아, 사실은~ 남자애랑 놀이공원 데이트 같은 거 처음이었거든. 그래서 엄청 긴장했는데~ 오늘은! 마지막에 이벤트 놓친 거 빼고는 너무너무 좋았어!"
"...응."
"그니까, 고맙다고~!"
"...나도!!"
아시도가 빠르게 이야기했다.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그러더니 쌩 돌아서는, 휙 하고... 뛰어가 버렸다. 여전히... 키리시마에게 아시도는. 어려운 애였다. 그래도 조금은 친해진 것 같기도 하고... 키리시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기숙사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방금 아시도에게 들은 말이 얼마나 엄청난 말이었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돌아섰던 아시도의 분홍빛 피부가 평소보다 더 붉은 빛이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bottom of page